우표이야기

뒤로가기
제목

세계최초의 우표 이야기

작성자 수집전문쇼핑몰 우문관(ip:)

작성일 2017-08-10 16:07:50

조회 956

평점 0점  

추천 추천하기

내용

물론 우편요금의 증지로서 우표가 발행되기 이전에도 우표나 소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들 우표나 소인인 현대의 그것과는 뜻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각국에서는 우편 산업의 수익성이 대단히 높아 일반 기업이 경영하는 우편과 국가가 경영하는 우편의 두 종류, 이외도 각 지역별로 운영하는 우편이 있었으나 이것은 모두 다 우편요금을 거리와 중량, 우편물의 종류에 따라서 요금을 지불하였으며 그 제도 역시 복잡하였습니다.
특히 국영우편은 더욱 복잡하여 국영 우편을 기피하는 현상이 많았으며 따라서 우편제도의 철저한 개혁을 희망하는 새론이 높아져 다각도로 연구한 결과 1840년에야 1페니로 하자는 균일요금제도가 결정되었습니다.
영국의 우편사업 개혁자로서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우랜드 힐경[ Sir Rowland Hill (1795 - 1879) ]에 의하여 세계최초 우표가 탄생한 것은 1840년 5월 6일 이었으나 최초의 우표 발행에 대해 힐경의 위대한 공적을 찬양하지만 첨부식 우편우표는 결코 힐경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824년 1836년 킨웨이 (영국증서부 지방)에서 선출된 하원의원 사무엘 로버트 (SAMUEL ROBERTS)는 편지에 1페니 우편요금을 채택하도록 권고한 문서를 의회에 제출하였으며 1834년 신문발행자인 찰스 나이트가 우편이 신문을 수송할 때 띠지를 사용하여 1페니의 공동요금으로 해야 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이런 제안 역시 1819년부터 1836년에 걸쳐서 쓰여진 액면을 스탬프한 설디니언의 편지에서 힌트를 얻어 이 제안을 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우편 개혁을 빨리 하자는 여론에 부딪혀 1835년에는 이 문제를 취급하는 특별위원화가 영국 의회에 창설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에 많은 보고서와 제안이 들어왔으나 좀처럼 진전을 못 보다가 1837년 로우랜드. 힐경이 '우편제도 개혁- 그 중요성과 실용성' 이란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요지는 영국 본국 전체에 대하여 1/2온스 (약 14g) 까지의 편지에 1페니의 균일한 요금을 채용하도록 제안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편요금을 선불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힐의 논문이 대단한 호평을 받다 힐경의 제안은 토론의 기초가 되어 1839년에야 우편 개혁의 제안이 채택되어 빅토리아 여왕의 서명을 얻어 1840년 1월 1일로부터 발효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힐경의 제안은 편지는 액면에 인쇄한 특별 봉투에 넣어서 운송해야 된다고 되어 있어, 이를 윌리암 멀레디 (Willwam Mulready)에게 우편물용 특별봉투를 디자인하도록 위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단디에 있는 인쇄소 주인이자 책방 소유자인 제임스 촬머스가 붙이는 방법의 우표를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바로 이 아이디어가 후에 로우랜드, 힐경의 우편개혁 가운에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붙이는 방법의 우표를 사용하는 아이디어 역시 최초의 제안은 아니었다는 것을 언급해 두고자 합니다 )
1831년 류부리어너(유고스라비아 북서부에 있었던 슬로베니어의 수도) 이 우편요금의 간소화와 편지 요금 납부를 확인할 수 있는 붙이는 식의 우편우표 채용등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제안을 거부 하였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계최초의 우편우표 채용국이 될 뻔 하였으나 10년이 늦은 1840년에 영국이, 세계최초로 우표 채용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수정

비밀번호 입력후 수정 혹은 삭제해주세요.

댓글 수정

이름

비밀번호

내용

/ byte

수정 취소

비밀번호

확인 취소